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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체험기

움직이는 종합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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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7-29 18:23 조회5,7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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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에서 한계가 왔습니다. 약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자연 치유력이 없는 것이지요. 국선도를 해보시지요. 일주일만 해도 몸의 변화를 느끼실 것입니다."
 한의사가 ‘국선도’를 내게 처음 권면할 때 하던 말이다. 2001년 10월 28일 권유를 받고 다음날 나는 국선도장을 찾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국선도는 내게 새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그 당시 내 몸과 마음은 지쳐있었다. 매일 매일이 고통이었고 마치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절말감 속에 빠져 있었다. 7-8년을 서양 의학과 한의학에 의지하여 있었기에 약해진 심신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국선도 수련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병원을 찾은 환자의 모습이었다. 입회원서를 쓰면서도 나는 힘겨워했으며 주민등록 번호와 좋아하는 음식을 써야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고 기억을 더듬을 기력이나 의욕도 없었다. 기혈유통법(준비운동)을 사범님께서 자세히 가르쳐주셨고, 누워서 대금소리를 듣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몸도 피로하고 지쳐 있었지만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한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한 날이었다.
 준비운동의 모든 동작을 따라할 수가 없었던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따라했다. 사법님은 3개월을 하루도 빠져서는 안된다고 단호히 말씀하고, 나는 말씀에 따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오는 마음으로 국선도장을 찾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만큼 힘들었기에 택시가 나의 교통수단이었다.
 94년부터 나는 무슨 병인지 모르고 3~4년을 이 병원을 헤메고 다니다가 한양대학병원에서 ‘류마티스 섬유조직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4년이 지났다. 특별한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고 병명조차도 생소한 이병은 나를 지치게 했으며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생각 때문에 약을 먹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이때 나는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사업 확장으로 인해 사표를 내고 남편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천안에서 속옷 매장을 네군데나 운영하고 있었기에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나는 쉬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2001년 8월에 나의 몸은 스스로 살기를 포기할 만큼 지쳐버린 것이다.
 오랜 시간의 좌절로 약해져있던 나에게 새 힘이 솟구치기 시작한 것은 국선도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국선도장을 찾은 지 5일만에 나타난 변화는 두 시간 동안 낮잠을 잘 잤다는 것이다. 2-3년만에 처음으로 깊은 수면을 취했던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수면장애가 있었기에 잊고 있었던 개운함과 상쾌함을 잠시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잘잤다라는 것이 아! 이런것이었구나’다고 새삼 느끼면서 잠시였지만 나는 기뻤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으나 나의 기쁨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매일 또는 종종 느끼면서 살고있기 때문에......
 수련을 시작할 당시 나에게는 ‘류마티스 섬유조직염’, 말고도 페기능 약화, 심장, 신장, 위장기능 약화, 오른쪽 마비증세(자각증세는 느낄정도)등 몸의 기능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나의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무리하게 일을 했으며 오른쪽 가슴이 늘 뻐근하게 아팠다. 입만 열면 안 아픈 곳이 없는 종합병원이었다. 관절통, 근육통, 신경쇠약, 우울증, 수면장애, 체력저하 등 이러한 증상이 있어도 병원의 어떤 검사로도 확인되지 않는 병이 ‘류마티스 섬유조직염’이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이 보면 꾀병과도 같은 병이기도 하다.
 수련을 시작한 뒤에 내게 다시금 찾아온 것은 가장 많이 아팠을 때와 같은 통증이었다. 몸이 많이 아팠지만 호전반응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견디어 냈다. 여러날 아프고 나면 전보다 많이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은 좋아졌으며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2001년 여름에 ‘이대로 죽겠구나’하던 생각이 수련을 3개월동안 한 후에는 ‘이제는 죽지 않겠구나’로 바뀌었던 것이다. 밤에는 여전히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 수련이 계속되었다. 낮잠을 두 시간 동안 잘 잤던 것은 회복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초조해 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7-8년의 긴 세월동안 아팠기에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수련중에 장이 많이 꿈틀거리더니 수련이 끝나면 방귀가 계속 나왔다. 마치 기관총 소리와 같이(따따다 따다다다다... ) 20-30분 동안 이어서 뀌어대는 바람에 가족은 모두 코를 막고 대피를 해야만 했다. 열흘을 두고 계속 뀌어대던 방귀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수련을 시작하고 2주만에 굉장히 아팠고 3-4일을 두고 앓아 누웠었다. 그러나 몸살을 앓고 난 후 많이 회복되어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발목에서는 삐그덕 소리가 요란했고 뒷목에 뭉쳐있던 근육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하게 굳어있던 근육이 말랑말랑해지자 나는 다시금 희망을 가졌다. 오른쪽 머리로 원활한 산소 공급이 안되어서 오른쪽 안면 근육에는 마비 증세가 있었으며 침이 흐르고 말도 어눌해져 왠지 어색했었기에 나에게는 놀라운 현상이었고 기쁨이었다. 몸이 하루하루 좋아졌으며 관절의 통증도 많이 줄어들었다.
 3주가 지나면서 정리운동도 몇 가지씩 따라했다. 얼굴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동작이 있는데 뼈가 아파서 세게 누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누르면 시원하다고 했다. 5개월이 지나면서 나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리 운동 중에 팔 다리을 교차할 때는 어지러움증 때문에 별을 본 것도 여러 번이었다. 어지럽고 힘겨웠지만 잘 참아냈고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은 점점 좋아졌던 것이다.
 1개월이 되는 날 기신법과 입단행공을 처음으로 따라했다. 수련을 함께 하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 솟구쳤던 것이다. 땀에 흠뻑 젖었으나 힘이 넘치고 있음이 놀라웠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기신법과 입단행공을 따라할 기운이 없었다. 이때부터 집에서도 준비운동과 호흡을 하기 시작했으며 열흘 후부터는 기신법과 입단행공을 따라할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나의 몸의 변화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로 넘치고 있었다. 무력감으로 의기 소참해 있던 나에겐 국선도가 자신감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평소 9월부터 내의를 입었다. 면 내의를 입고 그 위에 모내의를 입어야할 만큼 추위를 많이 탔었다. 12월에는 수련을 시작할 당시보다 날씨는 더 추웠지만 모 내의를 벗을 수 있었다. 50일이 지나면서 ‘중기단법 전편’을 시작했으며 새로운 호흡의 단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모두 새로운 동작이라 잘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두 달을 거의 빠지지 않고 수련을 한 후에 2박 3일의 경주여행도 나녀올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경주에 다녀오고 5일을 앓아 눕기는 했지만...
열흘만에 수련장을 찾았고 새로운 힘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상쾌함도 다시 되찾았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잠을 잘 자고 있었고 낮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속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식사 준비도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었기에 나의 가정 생활도 활기가 넘쳤다. 2-3개월을 몹시 힘들게 수련을 했지만 지금은 새로워진 나의 생활이 행복하다.
 내겐 고1의 딸과 중2의 아들이 있다. 아들은 건강하지만 딸은 내 체질을 닮아서인지 몹시 피곤해했다. 병명도 없이 힘들어하는 딸과 함께 국선도장을 찾으면서 딸의 생활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중3의 겨울방학동안 2개월의 짧은 수련이었지만 굳어있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고 있음을 체험했다. 수련을 마치고 나면 안정된 얼굴로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학생들이 국선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시간이 나는대로 수련장을 찾곤 한다. 지금이 더 절실히 국선도가 필요한 시기인데 우리 나라 학교생활은 학생들에게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여름방학이 되면 열심히 수련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도 국선도를 통해 새 삶을 산다는 선배 수련자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삶을 바꾸어 놓은 ‘국선도’를 평생을 두고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국선도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는 내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국선도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기를

 2002. 4. 10   김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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